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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02 02:38 (859)   마음이 만난 자리(아름다운 동행 기고글)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간호사가 약간 당황한 말투로 어떤 외국인 여자분이 나를 다급히 찾는다며 전화를 돌려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영어에 서툴었던 나는 가까스로 다음 날 오후 3시에 병원으로 오라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데리고 온 딸 제인은 스웨덴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돌이 되기도 전에 입양된 한국인이었다. 결혼한 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가지지 못한 부유하고 교양 있는 양부모는 제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제인이 다섯 살 되던 해 동생이 태어났다.

 

 그러자 제인의 마음 속에는 부모가 자신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불만이 쌓여 갔다. 부모를 쏙 빼닮은 서구적인 외모의 바비 인형 같은 여동생이 미웠다. 차라리 이런 감정을 표현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깊이 패어버린 마음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일찍 아물 수 있었을텐데, 그녀는 자신을 꽁꽁 숨겼다.

 

 사춘기가 되면서 제인은 더 심각해졌다. 학교 가기를 거부하고 방에 틀어박힌 채 면도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는 딸의 모습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던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정신과의사인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제인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나 또한 영어실력이 형편없었다.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면서 서툰 영어로 하는 상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두세달이 지나도록 제인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서툰 언어로 들어 주고, 믿어 주고,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마침내 제인이 자기 마음 안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 고국을 떠나 낮선 곳에서 얼마나 깊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마지막 진료 날, 제인은 내게 한국에서 만난 아버지 같다면 눈물을 터트렸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제인을 통해 배웠다. 진정성이 있다면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치료자의 열의만 있다면 마음이 만난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이다...

 

(아름다운 동행- 2013년 2월 기고글)

 

   

 

 

어린 가섭의 어머니
거식증(Anorexia Nervosa) - 코리아 타임즈 2013년 1월 18일자에 실린 글